여자의 견해(2) 중국조선족에 대해

일본체험수기 · #316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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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 · 2007-11-29 11:48:07 · 조회 1096
전 문과생도 아니구 력사정치에 대해선 깜깜무지일 정도입니다.
넘 심각한건 한참 시간들여야 이해가능이구
넘 폭넓게 펼쳐진 화제는 얼먹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생각짧은 여자의 견해를 적으보려는데요~간략칭으로 쓴거에 대해 양해구합니다.

누군가 여러번 여기에 이런 말 적어셧다
"왜 조선족만이 자신을 중국사람조선족이라구 자칭하는가구?
이민한 한국사람 중국사람은 몇대를 지나도 자신의 조국에 대해선 태도가 선명한데 왜 조선족만은..."

중국은 창립시 단일민족이 아닌 56개민족을 하나로 해야 한 현실이다
중화민족이란 커다란 개념속에 소수민족이란걸 포옹햇다
그래서 새로운 명칭 중국사람 조선족이란 명사가 우리에게 만들어졋다
그리구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되는 기쁨을 중국과 같이햇고
그 힘겨움도 같이 겪어왓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엔 할머니,할아버지의 손으로 가꿔온 냄새가 베여잇다
(넘 먼 선조가 아니구 가깝게 계시는 식구의 땀이 슴베여잇기에 실감이 간다)

지금 세계어느 나라의 사람이 중국에 이민 오더라도 중국사람~~민죽이란 칭호가
만들어지지 않을것이다.그리구 어느 나라에 이민 가더라도 우선 그나라에선 영원히
이민온 사람을 그나라 사람으로 받아주지않는다.
중국사람이 미국에서 가령 "나 미국사람이야~"해도 미국사람 코웃음친다.
(민죽심이구 조국개념이구 다 둘째치고 인정을 못받는다)

중국조선족이란 그시기 그당시 그력사배경에 만들어진 특수한 존재이다
한국,조선이 가장 힘겨운 건설시기 우리 중국조선족은 해준게 없다
그래서 우릴 그냥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받아주고 용납해달라고 하는건 넘 생각이 단순한것같다.

일본에 와서야 내가 서잇을 자리가 선명히 알게 되엿다
나 어디까지가나 중국조선족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잇어야하고 그 책임을 져야한다.

어디서 뭐가 어떻게 엇갈리구 잘못된지는 몰라두
피할수 없는것이라면 즐겨야 하기에 쭉 중국조선족이라는걸 자호감으로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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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35)

aa1 · 2007-11-29 12:06:52
잘  말했습니다.

게사니가  아무리  오리무리에  끼여서

"야  오늘부터  나도  오리질하겠느니까  우리  같이  놀자"

이래서  게사니가  오리로  변하는건  아닙니다.

게사니가  오리로  변하겠다고  웅장한  몸집을  다이어트해서

오리와  같은  체구로  변할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큰  힘으로  외계의  적들을  물리쳐서

오리무리를  보호해주면  오리들도  승인해주고  더욱  잘  따를것입니다.
백골부대 · 2007-11-29 12:28:15
쉼터를 보면서 여러번 느끼곤 하는데
적지 않은 쉼터의 조선족들이
한가지 잊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함에 있어서
우리의 많은 조선족들이 피땀을 흘리고
지어 생명까지 바치였다는것입니다.
즉 우리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많은 창건자들중의 일원인것입니다.
연변의 산과 들에는,
아니 나아가서 동북의 산과 들은
우리 민족의 피로 붉게 물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조선족은
새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피를 흘려 창건한
새중국을 사랑하고
우리 선조들이 피를 흘려 바꿔온 
새중국에서의 우리 조선족의 위치를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변의 조선족치고
천척중에 렬사나 퇴대군인이 없는 사람
손을 들어보시요!!!
있습니까?!
없지요!!! 
연변조선족은
한집건너 렬사가 있고 군인이였습니다!

우리 10촌이내 친척중
조선독립운동, 항일전쟁, 국내전쟁,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한 분 8명이나 됩니다.
그중 한분은 생명을 잃었고
또 한분은 영구한 잔페가 되였고
기타 분들도 다다소소 부상을 입었댔지요.
저의 부모도 군인출신입니다!

우리 모두 선조에 미안하지 않게 삽시다!!!  


paris · 2007-11-29 12:38:27
위에~

그 렬사개념을 항일인가 항미인가 구분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항일투사라면 하늘 우러러 부끄럼 한점 없겠지만

항미원조에 나간 렬사라면 문제가 좀 복잡하다구 생각하꾸마

이유가 어떻든 결국은 동족상잔이 되였잖습니까?

어떻게 보면 중국이 참 교활하게도

형제들의 싸움(조선전쟁)에 우리 조선족들을 잘 이용해 먹었으꾸마 -_-;;

그걸 영광이나 자호감으로 느끼면 안되져
paris · 2007-11-29 12:41:59
그리고 .......새중국의 창건에 그렇게 많이 피와 땀을 흘렸는데

결국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번다고

정권은 한족들이 든든히 틀어쥐고 있죠 ㅎㅎㅎ

조선족들이 인구가 적다는둥 인재가 어떻다는 둥 리유가 어떻든간에

중국정권을 조선족이 잡을 날은 과거에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없다고 봅니다 

 
로빈 · 2007-11-29 12:56:59
내 생각두 쥔장님이랑 같은 생각임다....
우선은 중국사람이지무...........
tenio · 2007-11-29 12:59:58
paris님이 6.25전쟁에 대해서 다각도 시점으로 역사공부 한걸 알게 되는 리플입니다.

지금도 항미원조라고 말하면서 그 당시 민족상잔전쟁을 논하는 사람들을 보면 쓴 웃음

만 나옵니다. 역시 그 당시 전쟁에 대한 정확한 역사관은 중국, 한국, 조선, 러시아, 미국

을 비롯한 유엔출전국들의 입장에서 문제 분석을 해야 하지 않을가 싶습니다
백골부대 · 2007-11-29 13:07:56
paris님에게:
력사를 외곡하지 마시오.
형제간의 싸움에 끼여든것은 미국입니다.
북조선군이 남쪽을 거진 다 내밀었을 때
미국이 인천상륙하지 않았습니까?!!!
력사를 조금 공부한 사람은
요만한 상식쯤은 알것이 아니겠습니까.
미국이 인천상륙하여 북쪽으로 올리밀고
중조변경까지 박근해왔을 때에야 항미원조가 시작되였지요...

의도적으로 력사를 외곡하고
조선족을 중국과 분리시키는 발언은 
우리중국조선족의 리익을 해치는
비렬한 행위로밖에 더 안되겠습니다!!!
 
로빈 · 2007-11-29 13:10:52
개두 할배들은 그래두 자기 땅으 지키자구 자부심갖구 전쟁참가했겟지....
몇십년지나니까..
손재들이  동족상잔한다구 뭐라하지무......
배부르니까 어저는 할배갖구 뭐라하는구나....
세상이 변하긴 변했다야...
8989 · 2007-11-29 13:15:09
Paris님 말이 틀린게 아니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역사를 왜곡한것은 중국과 북조선쪽에 더큰 것이 옵니다.

그럼 전쟁이 일어 날때 누가 먼저 전쟁을 발동했냐가 아주큰 문제점이 아니겠슴니까!
중국이나 북조선은 모두 한국에서 먼저 전쟁을 발동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북조선이 한국을 공격해서 일주일에 서울까지 쳐들어 간것입니다.
그러니 이 전쟁의 중요한 책임자는 응당 북조선에 있다고 봐야지요.

글고 제생각은 그때 로씨아와 중국에서  북한을 원조 하지 않고 그번 전쟁이 일어 나지 않았다면 현재는 어떻게 되였을가??? 하는 생각도 자주 합니다.
kinosita · 2007-11-29 13:15:46
한개 민족하고 한개국가를 동일하게 논하는건 불공평하다고 봅니다 

조선족은 우리중국의 한개민족이지 중국을 대표하는 정당이 아닙니다 

한국 조선에 해준거이 있고 없고는 그렇게 논하시는것이 아닌같습니다 

그리고 동족상잔이 아니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그럼 지금은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최근엔 조선이 어는정도로 배짱치기로 나오기에 조선족으로서의 우월감을 느끼기

도 할때가 있슴니다   항상 큰국가의 그느지에서 살아가는것이 지금이세상의 논리이지만

이러한 강육약식이 고도화로 체현된 현시대에 그래도 조선이란 국가의 존재는 역시 우리
 
민족의 얼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합니다 

옳바른 역사관이던 틀린 역사관이던 우리는 한반도에 있어서 민족분렬을 위한 전쟁을 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허나 그전쟁이 왜서 일어났을까 하는점은 모두들 어는정도로 분석할

수있으리라 믿고있습니다  단순이 중국탓인가 그러면 미국탓인지  아니면 일본의 침략에

무능햇던  정부의 탓인지는 잘 분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 
8989 · 2007-11-29 13:18:57
항미원조에 나아가서 희생된 우리 조선족들 군인적 각도와 나라를 보호한다는 각도에서는 아무런 착오가 없는겁니다. 군인이라면 모두 명령에 복종해야 하니 누가 좋던 나쁘던
따라야 하지요.

하지만 백성들도 참군해서 나간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그사람들 모두 중국의 일방적인 선전속에서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구호에 얼리워서  허무한 죽음을 당했다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paris · 2007-11-29 14:04:33
하지만 백성들도 참군해서 나간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그사람들 모두 중국의 일방적인 선전속에서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구호에 얼리워서  허무한 죽음을 당했다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족참전군한테는 아마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라기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더 선전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생각해보십쇼,....조선족이 중국에 정착한게 고작 백여년 역사인데 1950년대의 조선전쟁에 그나마 중국이 창립된지 1년이 되나마나 한데

조선족이 중국이 내 나라다는 그런 실감이 크겠습니까?

그니깡 보가위국의 구호는 크게 힘이 없을 것이고

아마도 그당시의 공산주의사상과 자본주의사상의 투쟁으로 (조선과 한국)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조선을 원조해야 한다고 동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요건 순 나 개인의 생각임 )

울집에는 항미원조에 나간 어른이 안계시니  물어볼 수도 없고

누기 아는 사람이 있음 알려주십쇼,,,

그당시 항미원조에 나갈 때 구경 어떻게 그많은 조선족들을 동원했는가








8989 · 2007-11-29 14:15:33
울집 가족에는 울할아버지 형님 . 울 할머니 오빠오 작은 동생 세사람이 조선전쟁에 나갔다.  울할머니 작은 남동생 밖에 돌아 오지 못했습니다.

이사람들은 모두 군인인 아니 일반 청년들이 선전에 따라서 가갔지요. 그당시 이승만이 미국놈들을 끌고 조선을 침략한다는 선전을 듣고 너도나도 참군했다고 들었습니다.

paris님 처럼 우에 사람들 정치하는 분들의 분기는 어떻는지 몰라도 그당시 문하상. 정보상 락후한 시대에  톱프가 어떻게 결정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야 사람들이 들끓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정보개방이란게 중요하다 이겁니다..

내 요몇일 그냥 싸워도 정보개방을 제대로 해야 모든 문제가 제대로 알립지...

kinosita · 2007-11-29 14:36:39
그럼 미국이 38선을 의해 공로가 크구만

미국이 없었더라면 이미 통일됐다 이말씀인지
 
좌우간 남의 나라 내정에 먼저 간섭한건 미국이란 말씀이구만
나오미 · 2007-11-29 14:38:45
저 백골부대는 력사공부 참 잘도 했군. 이때까지 얼리워가지고도 아직도 멍비돼있다니까.중국교과서에 쓴 력사사실이 백프로 사실이라고 믿는 니가 너무 불쌍하다.
그럼 너는 1989년천안문사건두 반혁명폭란이라고 믿겠구나.너라은 말이 안통해 답답하다.
파리스님은 박식한 분이네요. 정확한 력사는 김일성이 먼저 쏘련의 득을 믿고 한국을 먹어버리려고 쳤다가 미국이 참견했지요. 근데 중국은 조선처럼 사회주의고 또 미국을 미워하다니 조선을 도운거죠.중국은 교활하지요. 이때 우리 민족은 되놈들한테 리용당하여 억울하게 자기 민족과 쯔썅찬사했답니다. 
연변의 조선족들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자기위치가 있는것은 그때 한국이 조선한테 안먹히운 덕분이죠.
지금 연변사람들도 무식한 사람외에는 이걸 다 아는데 .우리 친척중에도 있습니다.그러니까 내가 이면에 대해 많이 들었죠.
만약에 김일성이 조선반도를 통일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가? 생각하기두 싫습니다. 
paris · 2007-11-29 15:21:27
내가 항미원조를 영광이나 자호감으로 느끼면 안된다고 했지

욕먹어야 된다고  한적은 없는데  -_-a;; 참 생각의 비약이 이런거였구려

그리고 명색은 미국만 참가한게 아니라 연합군이죠 ....저 먼데나라 터키도 다 군대 보냈는데 ㅎㅎ







8989 · 2007-11-29 15:37:31
이건 퍼온글이니 심심한 분들 읽어 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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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六二五戰爭, Korean Conflict]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6 ·25전쟁의 준비

한반도의 북반부를 점령한 소련은 극동의 적화를 위해 우선 중공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북한을 위성국화하는 전략을 폈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은 자유중국과 맺은 우호조약을 무시하고 자유중국군의 만주진입을 거부하였다. 소련은 만주를 중공군의 성역으로 보호하는 한편, 구(舊)일본군 조병창을 중공에 인계하고 만주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게 하여 중공군의 전력 증강에 힘썼다.

중공의 대륙제패가 거의 확실해지자 소련은 북한군의 강화에 주력하였다. 김일성은 소련 및 중공의 대폭적인 지원하에 무기를 들여오고, 남한 내에서 각종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는 등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적화통일을 위해 광분하였다. 소련군은 북한지역 점령 초부터 김일성을 후원하여 군사력을 조직 정리하기에 급급하였다. 1946년 2월 이른바 '평양학원'을 세워 장교를 양성하였고,
 
1946년 8월에는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를 창설함으로써 북한군 창설과 무력강화는 급속히 이루어졌다. 1947년 9월월'Wedemeyer 보고서'에는 북한군은 소련의 지원 아래 잘 훈련되었고, 충분히 장비된 12만 5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련은 북한군에 3000여 명의 군사고문관을 배치하여 직접 남침훈련을 시켰으며, 소련 출신 한인들을 중심으로 제105전차여단을 창설하였다.

또한 해 ·공군의 창설을 돕는 한편, 내무성 산하에 보안대 ·경비대 등의 이름으로 막강한 군사예비대를 확보하였다. 김일성은 남한에 끊임없이 게릴라를 남파하거나 남한 내에 있는 불순세력을 조종하여 사회 ·정치적 불안을 조성시키고, 한국군의 훈련과 전력증강을 방해하였다. 

북한 전역은 1949년 초부터 전시체제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병력보충을 위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각도에 민청훈련소를 설치하여 청장년을 훈련시키는 한편, 고급중학 이상의 모든 학교에 배속장교를 두어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한편, 북한 전역에 조국보위후원회를 조직하고, 17세부터 40세까지의 모든 남녀를 동원하여 강제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북한군은 사단별 훈련을 완료한 다음, 1949년 2월 말에는 적진돌입 및 적 배후 침투를 위한 보전포합동훈련을 실시하였으며, 1950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 전역의 지형을 연구, 이를 토대로 훈련을 계속하였다.

북한의 남침준비가 완료되자 소련 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개전에 임박하여 북한에서 철수함으로써 남침기도를 은폐하였다. 결국 김일성의 무력통일 야욕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결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① '조소군사비밀협정'(1949), ② 중공과의 상호방위조약 및 중국대륙의 공산화(1949), ③ 주한미군철수(1949), ④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성명(1950), ⑤ 무력침공에 대한 스탈린의 승인(1949) 등이 주요인이다.

6 ·25전쟁의 발생과 남북전력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YAK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 1000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일선에 동시에 투입하였다. 적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일제히 남진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1·6사단은 제105전차여단의 제203전차연대와 제206기계화연대의 지원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해 왔다.

 

6 ·25전쟁의 경과와 유엔조치

 남한에 대한 북괴의 남침을 평화의 파괴 ·침략행위로 보고 미국 정부는 6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즉시 소집을 요구하였다. 같은 날 오후 2시에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이 제출한 결의안을 9:0, 기권 1(유고슬라비아), 결석 1(소련)로 채택하고, 평화의 파괴를 선언하고 적대행위의 중지와 북한군의 38선까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동 결의안은 또한 모든 회원국이 동 결의안의 집행에 있어 유엔에 대하여 모든 원조를 제공하며, 북한집단에 원조를 하지 않도록 촉구하였다. 6월 27일의 안전보장이사회 회합에서 미국대표 W.R.오스틴 대사는 6월 25일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무시한 북한군의 계속적인 대한민국 침략은 ‘국제연합 자체에 대한 공격임’을 천명하고, 국제평화회복을 위하여 강력한 제재를 취하는 것이 안전보장이사회의 임무라고 선언, 안전보장이사회의 토의를 위하여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는 같은 날 정오에 대통령 트루먼의 발표문을 낭독한 후 “결의안과 본인의 성명요지 및 대통령 트루먼이 취한 조치의 중점은 유엔의 목적과 원칙, 즉 평화를 지지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그 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찬성 7, 반대 1, 기권 2, 결석 1로 유엔 회원국들이 동 지역에서의 군사적 공격을 격퇴시키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6월 27일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와 회원국이 제공하려는 원조형식에 관하여 보고해 줄 것을 요구한 6월 29일의 유엔 사무총장 서한에 대한 회원국들의 반응은 신속하였고, 압도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 각종 원조제공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대한민국 방위작전을 통일화하기 위하여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에 7:0, 기권 3, 결석 1로써 군대와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들이 미국이 지휘하는 ‘통합사령부’에 집결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한편, 미국과 관계 회원국들은 즉각적으로 동 결의에 따랐으며,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프랑스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 ·타이 ·그리스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16개국이 육 ·해 ·공군의 병력과 장비를 지원하였으며, 그 밖에 많은 나라들도 각종의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한국에 제공하였다. 

그 후 같은 해 9월 16일의 인천상륙작전을 전환점으로 하여 전세를 반전시킨 유엔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 10월에는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에는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38선이 돌파된 후인 1951년 1월 4일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서울을 철수하게 되어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고착되었다. 

1951년 2월 1일 유엔 총회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탄하고 한반도에서의 중공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앞의 6월 25일의 결의와 6월 27일의 결의에 소련은 결석했으며, 공산측은 결석을 거부권의 행사라고 주장하여 앞의 결의는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엔의 관행상 결석은 거부권행사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 ·25전쟁의 휴전회담

 유엔군의 북진에 맞서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이에 유엔 총회는 전투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12월 14일 ‘정전 3인단(Three-man Group on Cease-Fire)’을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캐나다의 L.페르슨, 이란의 N.엔테잠, 인도의 B.라우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 3인단의 임무는 한국에서 만족할 만한 정전의 기초를 결정하고 이를 총회에 권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 3인단은 중공대표와의 회담 ·교섭에 완전히 실패했으며, 이어 1951년 1월 1일에 중공과 북한은 대규모공세를 시작하였다. 이로써 총회의 정전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는 중공의 의사가 명백해졌다.

이에, 1951년 2월 1일 총회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에 의거 중공은 한국의 침략자라는 결의를 채택하고, 이어 5월 18일에는 동 결의 제6항에 의거 부과된 ‘집단적 조치위원회(Collective Measures Committee)’의 보고에 따라 중공과 북한에 대한 전쟁물자의 공급중지를 가맹국에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특히 6월 23일의 유엔 주재 소련대표 Y.A.말리크의 성명을 통하여 침략군이 전투행위를 중지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유엔군사령부는 공산군사령부와 직접적인 연락을 취하고, 7월 초에 휴전회담 개시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 장군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원산항에 있는 네덜란드병원선에서의 회담을 제안하였다. 중공군도 1 ·2차 춘계공세를 통하여 한반도에서 무력으로 유엔군을 격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회담개최 의사를 밝혔다.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위한 쌍방의 연락장교회담이 개최되어 쌍방의 정부대표 명단이 교환되고, 본회담 개최 장소를 개성으로 결정하였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본회담을 시작하였고, 10월에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겼다. 회담은 장기화하였고 파란곡절을 겪었다. 여러 문제에 있어, 특히 전쟁포로의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에 대하여 성실하게 교섭하지 않으려는 공산측의 비타협적 태도 때문에 유엔군 사령부는 2회에 걸쳐 총 9개월간이나 회담을 중지하였다.

1952년 10월의 휴전회담 중지에 이어서 유엔 총회는 1952년 12월 3일의 결의로써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을 재확인하고 전쟁포로문제 해결을 위한 총괄적 계획을 제안하였으나 공산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공산측이 광범위한 지연책을 쓰고 나서 1953년 7월 13일과 14일에 전란 중 최대의 공세를 취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과 중공군) 사령관 간에 휴전이 조인되었다. 휴전협정은 정전, 쌍방간의 비무장지대, 38선의 약간 이북을 대부분 통과하는 군사경계선 및 증강을 목적으로 한 군대와 장비의 한국도입금지에 관하여 규정하였다. 휴전협정 이행을 감시하고 지적된 위반사항을 논의하기 위하여 유엔군과 공산군 장교로 구성되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설치되고 동 본부를 판문점에 두었다.

동 협정은 또한 스위스 ·스웨덴 · 체코슬로바키아 및 폴란드로 구성되는 중립국감시위원단의 설치를 규정하였다. 동 중립국감시위원단은 한국에 병력 및 장비를 증강하는 데 관련된 휴전협정 조항의 준수 ·관찰 ·감시 ·조사를 할 수 있다. 휴전협정에는 정치문제 해결에 관한 조항이 없으나, 제60항은 휴전협정 조인 및 효력 발생 후 3개월 이내에 한국으로부터의 전외국군 철수문제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교섭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하여 양측의 관계정부가 각각 임명하는 고위층 대표간의 정치회담을 개최할 것을 양측의 우방관계국 정부에게 권고하도록 하였다.

 
6 ·25전쟁의 피해와 정치회담 결렬

 6 ·25전쟁의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었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또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 ·종교인 ·공무원 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휴전협정 제60항에 의거하여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대한민국과 유엔군측의 16개 참전국, 그리고 공산군측의 북한·중공 및 소련 등 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다.

대한민국과 유엔군측 참전 16개국은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방안으로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 비례에 의하여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자유총선거를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고, 그 결과에 의하여 통일독립된 민주적 한국정부를 수립하자'는 안을 제시하고, 주한 유엔군은 이러한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전을 지키게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공산측은 오로지 주한 유엔군의 철수를 강요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위장평화통일 제안을 내놓고 정치적 선전에만 급급함으로써 회담을 교착시켰으며, 회담은 같은 해 6월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휴전선으로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tenio · 2007-11-29 16:20:40
전쟁 발발시에 모택동이 3만명의 중국조선족 정예군을 김일성한테 넘겼고 이 부대는 즉시 인민군으로 편입됐다.
이 조선족으로 구성된 정예군은 중국내전시 림표의 동북군에 가입해서 동북으로부터 해남도까지 5년간 전쟁을 경험한 군인들이다. 수많은 전쟁을 경험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였고 전쟁 프로라고 할수 있다.
6.25전에 넘어간 사실은 북조선의 남침계획에 맞춰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이들은 6.25 전쟁발발시에 최전방에서 남한군과 미군을 밀어냈고 엄청난 전투력을 지녔다.
맥아더장군의 인천등륙으로 인하여 이들은 완전히 포위됐고 뿔뿔히 흩어져 북상퇴진길에 오른다. 결국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였다. 이 부대중에 우리 어머니의 친오빠도 포함됐고 결국 퇴진길에서 희생됐다.
생각해보라..피 흘려 싸워서 희생된 이분들이 지금의 한반도분열과 북한의 상황을 직접 보고 계신다면 어떻게 생각하고들 계실가?
백골부대 · 2007-11-29 16:31:42
  ! ! !
sandy · 2007-11-29 17:01:36
백골부대 오랜만이구만. 시간이 이렇게 지나두 활약하는 모습은 여전하구만.

유리님 말에 많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조선이 해준게 없다구 말하믄 그건 좀.....
사실 우리 조선족이 한국득을 꽤나 봤지요.
문화적인 면두 그렇구 여러가지로...
조선두 예전에 조선이 좀 잘 살때 조선득을 조꼼 봣지무.
님은 나이가 어려서 잘 기억안날수두 있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때 조선은 꽤나 잘 살았었구
조선에 친척있는 사람은 자랑으로 생각할시절두 있었습니다.
조선에 친척이있는 우리 외할머니는 조선에 가서 까만 구두두 가져오구 나이롤 적삼두
가져오구 비닐 그릇두 가져오구..그당시 중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였습니다.

득이라는게 별게 아닙니다. 
새로운 사물을 받아들이구 모르던 문화의 영향을 받게되면 그게 바로  득이지요.
유라 · 2007-11-29 17:31:44
싼디언니 안왓으면 내 말도 못삐칠번햇습니다.
력사를 쫙 례들이니 내 확인할게 넘 많아서 쳐다만 보고 있는데...ㅋㅋ

근데 싼디언니 내말을 거꾸로 이해햇어요
난 한국하구 조선에게 창립건설시기에 우리 중국조선족이 해준게 없다는 뜻인데유~
내 표달이 좀 이상해졋는감?
sandy · 2007-11-29 17:38:32
유라님. ㅋㅋㅋ 그런 뜻임댜?

내 자꾸 남의 글을 찬찬히 보는 습관이 없어서리. 대충 읽어보구 답풀 달아서 미안함더.

ㅋㅋㅋㅋ 나는 한국하구 조선이 우리한테 해준게 없다는 말인가 햇지무. ㅋㅋㅋ

우리 조선족선조들이 조선전쟁에서 자원군이로 편입되여서 아주 많이 전쟁에 참가햇지무.

조선족이 없었더면 지금의 조선이 없었을찌두.. ㅋㅋㅋ
sandy · 2007-11-29 17:40:21
나오미. 휴.....백골부대 아직 어려서 그런데 상대 하즈 마소.......ㅋㅋㅋ
백골부대 · 2007-11-29 17:52:11
하하핫...
배가죽이 아프게
한참이나 웃다가 갑니다...
나오미부터 그 아래를 보고...
구연단에 들어가 만담을 해도 되겠습니다...ㅋㅋㅋ...
감사합니다.
웃음을 주어서요...ㅎㅎㅎ...ㅋㅋㅋ...
유라 · 2007-11-29 18:03:42
싼디언니 내 분명 건설시기라고 밝혓는데.. ...
창립전에는 전쟁이 잇어서 누가 옳고 틀리구 판단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기에 난 잘 몰라유~
sandy · 2007-11-29 18:22:33
백골.  절 웃어라구 내 우정 그랜게요.

입이 째지게 웃소. ㅋ
sandy · 2007-11-29 18:23:15
유라님. ㅋㅋㅋ 미안함더. 내 자꾸 포티를 해서. ㅋㅋㅋ
말 하다나면 자꾸 포티 한단 말임더. ㅎㅎㅎㅎㅎ
좀 사유가 이상한지. ㅋㅋㅋㅋㅋ 미안함더.
土日 · 2007-11-29 19:23:56
미국이 참전해서 잘됐지.

북측같은 깡패정권이 조선반도 전체를

지배했다면 우리 조선족들은 짱깨들 앞에서

머리도 못들고 다니오.

한국도 여러가지 문제점이 많치만

그래도 북측이 조선반도 전체를

지배하기보다 천배 만배 낫소.
무구 · 2007-11-29 21:31:00
근데 궁금한데 말이요.중국이 일본의 교과서 날조에 항의 하던데 이거 웃기는 일 아니요? 저 백골부대 같은 사람 나무랄게 못되는데요. 사실 제가 아는 조선족들도 전부 저런식으로 교육받았지만  나중에 다 자신도 알게모르게 시나브로 진실을 알아버린...
역사를 조금 공부한 사람?허허허~~~
우리민족 역사를 평생 죽을때까지 다알까? 역사책 몇권 읽었다고 그것을 역사를 안다고  자부하면 미친늠 밖에 안되고~~~
 

킹님 · 2007-11-29 22:16:14
내 좀 말을 보태보깁소..
전쟁은 우리 백성,인민들의 도구가 아니다..전쟁은 지배계급들의 도구이고 수단이다..
우리가 (조선, 한국 ,중국 등 각나라 백성들,인민들)이 참가하는것은 지배계급들이 자신들의
권력, 자원,재부 를 추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나라 령도계급이 승리하고 패하고는 우리하구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무산계급--백성들)가 추구하는 것은 보다 좋은 생활, 안정된 생활,행복한 삶에 대한 추구이다..
이점으로 본다면 시간의 흐름은 이미 모든것을 증명하고 잇다..또한 증명되여 잇다..
나오미 · 2007-11-30 11:59:39
싼디님, 저 백골이 먼저 나를 건드렸단말입니다.난  종래로 누굴 먼저 욕한적이 없지요.
내가 민족쓰레기라고 나오미라는 이름까지두 일본년이름이라고 모욕중상했는데 내 이래두 가만있어야 한단말입니까?
 내가 언제 조선족을 욕했는데요.욕했다면 되놈밖에 없슴다.
 난 일본만세도 부른적없죠.
백골부대 · 2007-11-30 13:45:24
허참, 흥취가 전혀 없는 여잔데
왜 자꾸 요러지?..ㅎㅎ.
자기남자하고나 그럴게지...ㅉㅉ

여자가 왜 요렇게 사무러울까? ..ㅉㅉ..
어떤 여자들은 +욕이 만족안되면
사무러워 진다는 말을 들었는데...ㅋㅋ..

하나 소개해줄가요?

나오미 · 2007-11-30 16:20:51
그럼 남자들은 만족안되면  변태되는가?
앵무새 · 2007-12-06 12:18:39
결국 말하다 보면은 미국이 나쁘지 !
항상 중간에서 나쁜일만 한다니깐....
이쁜자증거 · 2008-01-09 16:56:08
독재인 공산당이 역사교과서를 편집하는데는 자기의 정권에 유리한쪽으로만 만들어 내지요. 어릴쩍에 그런 세뇌교육만 받고 살았으니 항상 나는 중국사람이란 자부심으로 살지 않겠어요?
조선민족은 단군자손이지 황하자손이 아니지요.. 중국조선족이라는것은 바로 이제 불리워진지 오십여년밖에 되지않지요. 공산당이 만들어낸 56개민족중의 한 민족으로서 창건이후 쥐여진 이름 아니겠습니까?
그 전에는 응당 조선사람, 고려인 등등으로 불리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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