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기 전에만 해도 너무 호강스러운 생활을 해서 그런지 생활의 험악한줄을 몰랐다 ...
일본에 와서 혼자 돈벌어 보고 고생해보고 나니 부모들의 심정도 어느정도는 이해할수 있을거 같다 .
내 일본생활이 시작되면서 한번도 울 엄마 생각을 안해본적이 없다 ..이전에도 지금도 ......
울 엄마는 말띠였다 .말띠여서 그런지 일생동안 아주 부지런하게 살아왔었다 ...어려서 부터 .....
엄마는 육남매중 넷째였다 .우에는 언니 둘이고 오빠가 하나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엄마가 중학교 다닐 아니에는 집체생활이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언니 둘은 학교 다니고 하니깐 집에 공펄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중학교를 마치고 소대에 일하러 나갔다고 한다 ..건데 공부는 역시 하고 싶어서 일년만에 다시 한족고중에 들어가게 되였다고 한다 ...사실 울 엄마 형제들이 공부는 다 잘하는 편이라고 했다 .
소대에서 일하다가 학교 추천하는데가 있어서 대학도 가게 될수있었는데 그때 외할아버지 성분땜에 못가게 되였다고 한다 ..전에 외가집은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앗어도 그럭저럭 살아 갈수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분 구분할때 빈농이 였다고 했는데 외가집에서 방청살이 했던 사람이 그집에서 방청살이를 할때 많은 업신을 샀다고 하여 부농을 빈농으로 성분을 속였다고 해서 외할아버지는 문화혁명때 그일땜에 투쟁받고 울 엄마 학교 가는 일도 거길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학교가는 일도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했으니 그땐 그저 시집가는 일밖에 없었다 .우연히 울 아빠를 만나게 되여 엄마.아빠는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하게 되였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울 아빠는 장남이였다 .아빠형제도 여섯명이였다 .그때 큰고모는 시집갔어도 아빠 동생들이 넷이나 남았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성격이 워낙 까다로워서 울 엄마 시집살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
난 우리집의 둘째딸이였다 .할아버지는 그래도 손자보고 싶어서 딸은 하나 있었으니 둘째는 남집에 줘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난 그일만 생각하면 할아버지가 괘씸해난다 ...
그렇게 시집살이에 고달퍼했던 엄마가 우리 어릴때 하는 말이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딸 둘이 키운면서 절대 맏아들한데는 시집안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
우리 형제 셋이 놓고 내가 소학교 일한년 되던해 부터 엄마는 짠지장사를 시작했다 .그 짠지 장사가 칠년이나 계속되였다 .내가 소학시절 유일한 기억이라면 엄마는 매일 아침 8시면 집을 떠났다 .저녘 9시쯤에 집에 들어오군 했다 .여름에는 괜찮아도 겨울에는 정말 추웠다 ..동북의 겨울은 어지간히 추운것도 아니다 ...울 엄마는 매일 아침 짠지담을 광주리를 자전게에 달고 한시간이나 떨어진 기차역전앞에 가서 짠지 장사를 시작했다 ...우리집에서 기차역전까지 한시간 거리였다 ..자전거로 ......일년 365일 엄마가 휴식하는 날에는 그믐날 오후부터 초이틀까지였다 .초사흘날에는 무조건 장사길에 나서는것이였다 .그때 남집에는 설쉰다고 장보러 가고 했는데 울 집에는 그믐날 오후에 엄마 하고 아빠가 같이 들어오는것이였다 ..아마 어디서 약속을 해서 같이 장보고 오는것 같았다 ...
그렇게 하다 보니 우리 형제들의 공부고 생활이고 관계할여지가 없었다 ..난 소학교때 부터 학부형회하면 언제나 할머니가 갔었다 ..엄마는 언제나 집에 없었기에 ...나의 친구들도 울 엄마 얼굴 못본애들이 많을것이다 ...다행이 그래도 형제들은 빗나가지 않았다 ...언니는 대학입시시험에서 실패하여 자비대학에 갔었고 난 그래도 얼렁뚱땅 본과는 갔었다 ...그렇게 짜지장사 칠년만에 울 엄마도 신장결석이 걸렸던 것이다 .의사말에 의하면 추운데서 너무 오래 있어서라고 한다 ...그후로 엄마는 짜지장사 그만두고 식당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
내가 초중 삼학년 되던해 울 집에는 또 식당을 하기 시작하였다 ...식당도 이년정도 했었다 ....식당은 사람이 많이 고달팠다 ...신경쓸일도 많았었고 ...
그후로는 식당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것도 그만두었다 .....내가 대학교 이학년이 되는해 아빠가 한국에 가게 되였다 ...남들같으면 남편이 나가서 돈번다고 집에 앉아서 놀것인데 울 엄마는 그래도 생활비는 벌어야 한다고 또 식당에 출근하게 되였다 ...그 월급으로 우리 형제 생활비 대고 하였다 ...그때 울 엄마 다니는 식당은 한식당인데 주로 개고기와 냉면을 하였다 ..매일 개고기를 손으로 째고 하니깐 개고기도 독이 있는지 손톱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식당에서도 거의 이년정도 했을것이다 ...그때 내가 엄마 손 봤을때느 오른손 엄지 손가락의 손톰이 썩어 있는 상태였다 ......
그렇게 고생하고 내 동생이 대학 가는 해에 울 엄마가 한국을 가게 되였다 ...삼년만에 울 엄마 아빠는 같이 생활하게 되였다 ....한국에 있을때는 그래도 전화올때마다 부모들의 행복한 웃음이였다 ..그 웃음이 우리에게는 힘이 되였고 또 행복했었다 ..
부모들은 한국에서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았고 우리 형제들은 중국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열심히 살았다 ...그때 난 졸업해서 사업단위에 취직하고 동생도 대학교 다녔다 ...다른사람들 보기에는 너무나도 다정하고 행복한 가정이였다 .
내가 졸업해서 이년후에 일본에 오게 되였고 오년만에 울 아빠를 만나게 되였다 ...몇년만에 만난 부녀지간이라 더없이 친해진것 같다 .어릴때는 아빠하고 관계가 별로 였는데 ..실은 많이 무서워했지 ...
내가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육체로동을 시작했을때 울 엄마 아빠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이렇게 고달픈데 부모들은 오죽했으랴 ..외국타향에서 자식들도 보고 싶고 육체상에서도 많이 피곤했을텐데 하면서 ......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드문드문 난관에 부딕치고 했을때는 언제나 부모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 부모들이 있는데 내가 무서운들 뭐있겠는가고 ......
우리집 아들은 귀한 아들이였다 ..엄마가 할아버지 구박을 안받겠다고 기어코 난 아들이였다 ..그땐 또 계획생육을 해서 우리집엔 벌써 초과했었다 ..내가 둘째였으니 ...대대에서는 자주 찾아오지 울 엄마는 아들 놓겠다고 숨어 다니면서 어렵게 놓은 자식이였다.나의 입학시험날에는 울 엄마가 해준 찰밥과 물고기를 먹었다 .건데 내 동생 입학시험날에는 울 엄마가 한국에 있었다 .그래서 그일이 울 엄마는 계속 내려안가서 경제상에서 동생한데 많이 봉창해주었다 ...
엄마가 아파서 병실에 누워있을때도 눈만 뜨면 두리번 두리번 살피던 그 크고 정기있는 눈이 생각난다 ..아마도 아들을 찾았을거 아닌가 싶다 ...건데 유감스럽게도 엄마는 갈때 까지 아들 손 못잡아 보고 갔다 ...
엄마의 성격상에서 그렇게 세심하고 삭삭한 사람이 아니였다 ...내가 외국에 나와있어도 언제 한번 밥먹었나 ?공부잘하나 이런 물음은 한번도 한하였다 ...내가 아침알바를 한다고 했을때도 남들보다 두시작 적게 자는거 별일아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렇다 ......담들 부모들은 자식이 고생한다고 이렇게 저렇게 걱정하고 할겐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들이 그렇게 걱정해주면 자식들이 더 불편할줄도 모른다 ...사실은 엄마도 걱정은 하면서도 내 앞에서는 티를 안냈을 뿐이다 ..
엄마는 무뚝뚝하면서도 열정있는 사람이였다 ...
우리 형제들은 울 엄마를 이렇게 평가했다 ..엄마는 시기를 잘못타고 난 사람이였으니 가정에만 충실하였다 .지금쯤 태여났으면 아마 큰 인물이 되였을지도 모른다고 ...
비록 짧은 인생이였지만 남편 잘 만나서 재미있게 행복하게 살았고 자식들 키워서 속썩여 본적이 없었다 ..지금 말하면 딸년들이 시집안가서 좀 속썪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칙상에서는 무슨 위반행위가 없었으니 그래도 이만하면 자식들도 괜찬다고 본다 ...
난 울 엄마를 볼때마다 내가 장래 자식이 있으면 울 엄마가 우래한데 한것처럼 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엄마가 그렇게 억착스레 벌고 열심히 살았기에 지금까지 우린 남 부럽지 않게 살아왔었다 ...
울 엄마의 인생은 위대한 인생이라고 본다 .엄마로서 안해로서 며느리로서 해야할 모든 역할을 다 훌륭하게 하였다 .난 엄마를 사랑한다 ..이전에도 ...지금에도 ...이후에도 ...
엄마를 생각하면서 ......
일본에 와서 혼자 돈벌어 보고 고생해보고 나니 부모들의 심정도 어느정도는 이해할수 있을거 같다 .
내 일본생활이 시작되면서 한번도 울 엄마 생각을 안해본적이 없다 ..이전에도 지금도 ......
울 엄마는 말띠였다 .말띠여서 그런지 일생동안 아주 부지런하게 살아왔었다 ...어려서 부터 .....
엄마는 육남매중 넷째였다 .우에는 언니 둘이고 오빠가 하나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엄마가 중학교 다닐 아니에는 집체생활이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언니 둘은 학교 다니고 하니깐 집에 공펄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중학교를 마치고 소대에 일하러 나갔다고 한다 ..건데 공부는 역시 하고 싶어서 일년만에 다시 한족고중에 들어가게 되였다고 한다 ...사실 울 엄마 형제들이 공부는 다 잘하는 편이라고 했다 .
소대에서 일하다가 학교 추천하는데가 있어서 대학도 가게 될수있었는데 그때 외할아버지 성분땜에 못가게 되였다고 한다 ..전에 외가집은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앗어도 그럭저럭 살아 갈수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분 구분할때 빈농이 였다고 했는데 외가집에서 방청살이 했던 사람이 그집에서 방청살이를 할때 많은 업신을 샀다고 하여 부농을 빈농으로 성분을 속였다고 해서 외할아버지는 문화혁명때 그일땜에 투쟁받고 울 엄마 학교 가는 일도 거길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학교가는 일도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했으니 그땐 그저 시집가는 일밖에 없었다 .우연히 울 아빠를 만나게 되여 엄마.아빠는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하게 되였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울 아빠는 장남이였다 .아빠형제도 여섯명이였다 .그때 큰고모는 시집갔어도 아빠 동생들이 넷이나 남았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성격이 워낙 까다로워서 울 엄마 시집살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
난 우리집의 둘째딸이였다 .할아버지는 그래도 손자보고 싶어서 딸은 하나 있었으니 둘째는 남집에 줘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난 그일만 생각하면 할아버지가 괘씸해난다 ...
그렇게 시집살이에 고달퍼했던 엄마가 우리 어릴때 하는 말이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딸 둘이 키운면서 절대 맏아들한데는 시집안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
우리 형제 셋이 놓고 내가 소학교 일한년 되던해 부터 엄마는 짠지장사를 시작했다 .그 짠지 장사가 칠년이나 계속되였다 .내가 소학시절 유일한 기억이라면 엄마는 매일 아침 8시면 집을 떠났다 .저녘 9시쯤에 집에 들어오군 했다 .여름에는 괜찮아도 겨울에는 정말 추웠다 ..동북의 겨울은 어지간히 추운것도 아니다 ...울 엄마는 매일 아침 짠지담을 광주리를 자전게에 달고 한시간이나 떨어진 기차역전앞에 가서 짠지 장사를 시작했다 ...우리집에서 기차역전까지 한시간 거리였다 ..자전거로 ......일년 365일 엄마가 휴식하는 날에는 그믐날 오후부터 초이틀까지였다 .초사흘날에는 무조건 장사길에 나서는것이였다 .그때 남집에는 설쉰다고 장보러 가고 했는데 울 집에는 그믐날 오후에 엄마 하고 아빠가 같이 들어오는것이였다 ..아마 어디서 약속을 해서 같이 장보고 오는것 같았다 ...
그렇게 하다 보니 우리 형제들의 공부고 생활이고 관계할여지가 없었다 ..난 소학교때 부터 학부형회하면 언제나 할머니가 갔었다 ..엄마는 언제나 집에 없었기에 ...나의 친구들도 울 엄마 얼굴 못본애들이 많을것이다 ...다행이 그래도 형제들은 빗나가지 않았다 ...언니는 대학입시시험에서 실패하여 자비대학에 갔었고 난 그래도 얼렁뚱땅 본과는 갔었다 ...그렇게 짜지장사 칠년만에 울 엄마도 신장결석이 걸렸던 것이다 .의사말에 의하면 추운데서 너무 오래 있어서라고 한다 ...그후로 엄마는 짜지장사 그만두고 식당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
내가 초중 삼학년 되던해 울 집에는 또 식당을 하기 시작하였다 ...식당도 이년정도 했었다 ....식당은 사람이 많이 고달팠다 ...신경쓸일도 많았었고 ...
그후로는 식당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것도 그만두었다 .....내가 대학교 이학년이 되는해 아빠가 한국에 가게 되였다 ...남들같으면 남편이 나가서 돈번다고 집에 앉아서 놀것인데 울 엄마는 그래도 생활비는 벌어야 한다고 또 식당에 출근하게 되였다 ...그 월급으로 우리 형제 생활비 대고 하였다 ...그때 울 엄마 다니는 식당은 한식당인데 주로 개고기와 냉면을 하였다 ..매일 개고기를 손으로 째고 하니깐 개고기도 독이 있는지 손톱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식당에서도 거의 이년정도 했을것이다 ...그때 내가 엄마 손 봤을때느 오른손 엄지 손가락의 손톰이 썩어 있는 상태였다 ......
그렇게 고생하고 내 동생이 대학 가는 해에 울 엄마가 한국을 가게 되였다 ...삼년만에 울 엄마 아빠는 같이 생활하게 되였다 ....한국에 있을때는 그래도 전화올때마다 부모들의 행복한 웃음이였다 ..그 웃음이 우리에게는 힘이 되였고 또 행복했었다 ..
부모들은 한국에서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았고 우리 형제들은 중국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열심히 살았다 ...그때 난 졸업해서 사업단위에 취직하고 동생도 대학교 다녔다 ...다른사람들 보기에는 너무나도 다정하고 행복한 가정이였다 .
내가 졸업해서 이년후에 일본에 오게 되였고 오년만에 울 아빠를 만나게 되였다 ...몇년만에 만난 부녀지간이라 더없이 친해진것 같다 .어릴때는 아빠하고 관계가 별로 였는데 ..실은 많이 무서워했지 ...
내가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육체로동을 시작했을때 울 엄마 아빠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이렇게 고달픈데 부모들은 오죽했으랴 ..외국타향에서 자식들도 보고 싶고 육체상에서도 많이 피곤했을텐데 하면서 ......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드문드문 난관에 부딕치고 했을때는 언제나 부모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 부모들이 있는데 내가 무서운들 뭐있겠는가고 ......
우리집 아들은 귀한 아들이였다 ..엄마가 할아버지 구박을 안받겠다고 기어코 난 아들이였다 ..그땐 또 계획생육을 해서 우리집엔 벌써 초과했었다 ..내가 둘째였으니 ...대대에서는 자주 찾아오지 울 엄마는 아들 놓겠다고 숨어 다니면서 어렵게 놓은 자식이였다.나의 입학시험날에는 울 엄마가 해준 찰밥과 물고기를 먹었다 .건데 내 동생 입학시험날에는 울 엄마가 한국에 있었다 .그래서 그일이 울 엄마는 계속 내려안가서 경제상에서 동생한데 많이 봉창해주었다 ...
엄마가 아파서 병실에 누워있을때도 눈만 뜨면 두리번 두리번 살피던 그 크고 정기있는 눈이 생각난다 ..아마도 아들을 찾았을거 아닌가 싶다 ...건데 유감스럽게도 엄마는 갈때 까지 아들 손 못잡아 보고 갔다 ...
엄마의 성격상에서 그렇게 세심하고 삭삭한 사람이 아니였다 ...내가 외국에 나와있어도 언제 한번 밥먹었나 ?공부잘하나 이런 물음은 한번도 한하였다 ...내가 아침알바를 한다고 했을때도 남들보다 두시작 적게 자는거 별일아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렇다 ......담들 부모들은 자식이 고생한다고 이렇게 저렇게 걱정하고 할겐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들이 그렇게 걱정해주면 자식들이 더 불편할줄도 모른다 ...사실은 엄마도 걱정은 하면서도 내 앞에서는 티를 안냈을 뿐이다 ..
엄마는 무뚝뚝하면서도 열정있는 사람이였다 ...
우리 형제들은 울 엄마를 이렇게 평가했다 ..엄마는 시기를 잘못타고 난 사람이였으니 가정에만 충실하였다 .지금쯤 태여났으면 아마 큰 인물이 되였을지도 모른다고 ...
비록 짧은 인생이였지만 남편 잘 만나서 재미있게 행복하게 살았고 자식들 키워서 속썩여 본적이 없었다 ..지금 말하면 딸년들이 시집안가서 좀 속썪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칙상에서는 무슨 위반행위가 없었으니 그래도 이만하면 자식들도 괜찬다고 본다 ...
난 울 엄마를 볼때마다 내가 장래 자식이 있으면 울 엄마가 우래한데 한것처럼 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엄마가 그렇게 억착스레 벌고 열심히 살았기에 지금까지 우린 남 부럽지 않게 살아왔었다 ...
울 엄마의 인생은 위대한 인생이라고 본다 .엄마로서 안해로서 며느리로서 해야할 모든 역할을 다 훌륭하게 하였다 .난 엄마를 사랑한다 ..이전에도 ...지금에도 ...이후에도 ...
엄마를 생각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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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10)
벌써 세상을 떠나다니 ...너무나 안타깝네요.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만큼 위대한건 없습니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만큼 위대한건 없습니다.
어머님이란 잃은후에야 그 소중함을 알수 있는 공기같은 존재이지우,또 이제 자식 낳아 키우면서도 어머님생각 많이 날거라 생각합니다,지금 할수있는거라면 힘내서 천국에 계시는 어머님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지유,몸건강 축원합니다.
절반 읽구 눈물이 나서..
우선 먼저 추천한표 넣구 이담에 천천이 볼께요.
우선 먼저 추천한표 넣구 이담에 천천이 볼께요.
목이 메네요...
넘 슬퍼요...
천국가신 어머니 걱정안하시게 꿋꿋하게 잘 살아요...
넘 슬퍼요...
천국가신 어머니 걱정안하시게 꿋꿋하게 잘 살아요...
눈물이 나요 .. 남일 같지가 아나요 ...
고생만 하시구 별 락두 누리지 못하구 가신 어머님 ... 정말 안타깝네요
고생만 하시구 별 락두 누리지 못하구 가신 어머님 ... 정말 안타깝네요
님 글 보니 가슴이 뭉클해옵니다...우리 어머니도 우리 아버지 맏이 한테 시집와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는데... 하늘에 계시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부디 씩씩하게 잘사시길 바가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대단한 어머님이시군요...
넘 많이 생각하지 마시구...
열심히 살아나가세요...
대단한 어머님이시군요...
넘 많이 생각하지 마시구...
열심히 살아나가세요...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가정을 위한 주부의 마듬 , 다같은것인가 봅니다 ,,,님 어머니는 더 그러하시구 ,,,
보낸 사람한테 보답이란 남은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그것을 보여주는것뿐인거 같습니다 ...
하루하루가 행복하시길
보낸 사람한테 보답이란 남은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그것을 보여주는것뿐인거 같습니다 ...
하루하루가 행복하시길
어머니를 그리는 겨울바다님...지금의 심정 많이 알것같습니다...
옛날에 제가 어렸을때 울어머니가 외할머니의 이야기 들려주시면서 많이 우시고...
그러던 울어머니도 외할머니처럼 자식 위해,시집위해 자신인생다태우시고...
겨울바다님도 어머니가 되실때에는 님이 어머님처럼 대단한 분이 되실겁니다...
열심히 사세요....
옛날에 제가 어렸을때 울어머니가 외할머니의 이야기 들려주시면서 많이 우시고...
그러던 울어머니도 외할머니처럼 자식 위해,시집위해 자신인생다태우시고...
겨울바다님도 어머니가 되실때에는 님이 어머님처럼 대단한 분이 되실겁니다...
열심히 사세요....

겨울바다 님도 꼭 좋은 엄마가 될껏 같은 느낌이 옵니다. 좋은 엄마의 교육을 받았으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