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를 만나 뵙다
중국 4대 문묘의 하나인 길림문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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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시 문묘정문앞에 다가설무렵은 점심때가 가까왔고 한낮까지 내리던 지겨운 비도 멈추었다. 가는 골목길 량켠에는 낡은 책을 파는 상가가 줄 늘어섰고 문묘의 앞에는 골동품을 파는 상가도 있어 청조시기의 건물의 문화문위를 높여주는것만 같았다.조선족들에게는 사당이라면 선조님들의 신위를 모시는 작은 규모의 별채가 떠오르지만 위대한 사상가, 유가학파의 창시인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은 중국문화명소답게 규모가 있었다. 방대한 사당을 둘러보는 동안 문묘가 문화대혁명시기 홍위병들의 시달림에서 살아났다는것이 기적 같았고 그후 다시 터진 공자를 비판하는 운동속에서도 건재했다는것이 자못 신비롭기도 했다.아직도 이른봄같이 기온이 낮은지라 관광객들이 발길이 뜸해 약간은 적요했다. 《도라지》문학잡지 사장 겸 길림시조선족문화관 관장 전경업씨의 련락을 받고 길림시문묘책임일군이 열쇠뭉치를 들고 우리 일행을 안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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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강북안에 위치한 길림문묘는 광서33년(1907년)에 새로 건조한것이고 원적지는 지금의 길림성제1실험소학교울안에 위치해있다. 청조시기 관원들은 매년 봄, 가을이면 이곳에 찾아와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원 길림문묘는 청나라의 건륭황제가 영길주 제2지주(知州) 위사민에게 성지를 내려 건조하도록 한것이다. 건륭원년인 1736년에 시작해 1742년에 완공되였다. 건륭55년(1790년)에 문묘에 불이 나 길림장군 린녕이 원지에 재건하여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광서 32년인 1906년에는 공자를 위해 제사를 치르는것이 국가대사로 승급하였다. 광서33년(1907년) 길림은 성행정구역으로 되였다. 제1임 순무 주가보와 제학사 오로는 문묘가 공자에 대한 존중과 경의를 표하기에 너무도 초라하다면서 강소도관 상영을 초빙하여 강녕에로 찾아가 남경부자묘건축을 고찰하게 하고 도양을 얻어오게 하였고 지금의 주소를 새로 정하고 2년 동안 건축을 진행하여 선통원년(1909년)에 주요건축물은 모두 완공됐다.
길림문묘는 동북에서 가장 큰 문묘이고 곡부공자묘, 남경공자묘, 북경공자묘와 함께 중국4대문묘에 꼽힌다. 문묘는 남쪽을 향해 건축되였고 부지면적은 1만 6354평방메터에 달하고 남북으로 221메터, 동서로 74메터 되고 3메터 높이로 된 붉은 담으로 둘러져있다. 주요건축물인 담장, 장원교, 반지(泮池), 령성문(棂星门), 대성문, 대성전, 숭성전의 순서로 하나의 중추선에 놓여졌다.우리는 먼저 문묘서쪽에 있는 편문으로 들어갔다. 편문에는 패방이 설치되여있는데 거기에는 “도관고금” 4자가 새겨져있었다. 이는 공자를 형용한것으로 공자의 공헌이 크고 그의 주장은 고금이래 최고임을 이르는 말이다.
책임일군을 따라 우리는 령성문을 지나 문묘의 중심건축물인 대성전을 향했다. 령성문은 문묘에만 존재하는 건축물이고 기둥은 4개이고 폭은 3칸으로 되였다. 《후한서》의 기재에 따르면 령성은 천전성을 이르는 말로써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치를 때 우선 령성에게 제를 지낸다고 한다. 문묘에 령성문을 설치한것은 당시 공자에게 제사를 치르는것이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치르는것처럼 중요하였음을 보여준다. 4개의 기둥우에 신수 4마리가 조각되여있는데 이는 공자를 신명으로 받든다는 표식이다.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길 오른켠은 청나라풍의 길게 일렬로 늘어선 건물들이였다. 그것들은 다소 낡았지만 고풍스런 느낌이 물씬 살아있었다.문을 열자 서늘한 기운과 함께 진한 솔향기가 풍겨나와 숭엄한 기분이 들었다. 그안은 명청시기 과거제도에 관한 작은 박물관이였다.방가운데는 과거시험장 모형이 있었다. 넓다란 운동장에 시험장이 1렬종대로 약 스무나문줄이 서있었고 군데군데 높다란 전망대가 있어 수험생들을 감시하게 설계되였다.이렇게 어마어마하고 삼엄한 시험장을 8국련합군이 불태워버렸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오른켠은 수험장 두칸을 1:1의 비례로 재현한 모형이였다. 1평방 남짓한 칸에 수험생 한명씩 들어가는데 시험을 치르는 2박3일동안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먹을것은 날라들여가고 대소변은 요강으로 해결을 봐야 했고 얇다란 판대기를 두어 낮에는 가슴께에 오게 받쳐 책상으로 사용하고 저녁이 되면 방바닥에 깔아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쪽잠을 자야 했다.
시험때 컨닝하는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것 같았다. 벽 한켠에는 누렇게 색바랜 컨닝종이가 진렬돼있었는데 붓으로 어찌 그렇게 깨알같이 적었는지 참 신기했다. 옛날에는 과거에 뜻을 이루지 못한 선비들이 이렇게 속옷이나 종이에 수험내용을 적어 팔아서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하는데 컨닝하다 들키면 처형당했다고 한다.

명청시기 과거시험은 향시, 회시, 전시 세개 등급으로 나뉜다. 향시로부터 차례차례 통과하여 황제가 직접 시험을 내는 전시까지 치르고나면 3갑을 뽑는데 1갑에 3명씩 총 9명을 뽑는다. 1갑의 1등을 장원, 2등을 방안(榜眼), 3등을 탐화(探花)라고 한다. 3갑의 아홉명을 진사라 하며 이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방이 노란색이란데서 금방제명(金榜题名)이란 말이 유래되였다고 한다. 제일 안쪽에는 과거제도에 장원을 한 수험생의 시험지가 높이 걸려있었는데 인쇄용 활자로 찍은것이 아닌가고 의심할 정도로 참 명필이였다.출입구쪽에는 명청시기 길림성 출신 진사들의 이름을 쭉 적어 전시해놓았는데 명청시기 길림성에 유난히 진사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길림성에 인재가 많이 났다고 하니 웬지 모를 긍지감이 샘솟았다.
청조때 과거시험을 보려면 우선 동시(童试)를 치러야 하는데 동시자격은 유생과 동생들에게만 허락되였다. 유학과 공자묘를 함께 학궁(学宫)이라 일컬었다고 설명하는 안내원의 말을 듣고서야 왜 공자묘에 중뿔나게 과거제도박물관이 있었는지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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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문은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정문이다. 지붕은 헐산식(歇山式)으로 되였고 마루에는 룡과 봉황이 정반면에 5마리씩 조각되였는데 이는 궁전건축을 본딴 건물의 특점을 보여주었다. 대성문을 지나면 대성전이 보인다. 대성전은 폭이 11칸이고 동서로 36메터, 남북으로 25메터, 높이가 19.46메터이고 겹처마 헐산식 지붕으로 되고 황색 유리기와를 얹었으며 그 상층마루에는 룡과 봉황이 정반면에 9마리씩 조각되여있었다. 대성전 17석의 조각상이 공봉되여있다. 높이가 3메터 되는 공자의 조각상이 가운데 자리잡고있었고 량옆에는 안회, 증삼, 자사, 맹가의 조각상이 있고 동서로는 “12철”, 즉 12명의 유학가들의 조각상이 있다. 동으로 민손(자건), 염옹(중궁), 단목사(자공), 중유(자로), 복상(자하), 유약(자약)이 있었고 서로는 염갱(백우), 재여(자아), 염구(자유), 언언(자유), 전손사(자장), 주희(원회)가 있었다. 조각상은 그 표정이 핍진하고 형상이 생동하여 매 사람의 성격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12철”의 뒤면의 벽에는 대형벽화 “수룡도”와 “화룡도”가 그려져있는데 그 기운이 생동했다.
대성전안에는 제사를 지내는데 쓰는 악기들이 있었고 문묘를 찾아온 유람객들이 공자에게 절을 드릴수 있도록 방석이 깔려져있었다. 그리고 그옆에는 작은 붉은색 나무판이 수두룩이 걸려져있는데 여기에는 친인들에 대한 축복이 담겨져있었다.문묘의 뒤울안은 공자의 가묘인 숭성전인데 여기에는 공자의 우로 하여 5대의 조상의 패위가 공봉되여있다.
대성전에서 나오면서 대성문의 안켠에 놓여진 북과 종을 발견했다. 필자는 문옆에 놓여져있는 북을 보면서 선입관으로 옛날에 원한이 있는 백성들이 관아에 찾아가 두드리는 북인줄로 착각했었다. 필자가 저 북은 무엇을 하는데 쓰는것인가고 물어보니 안내원은 동쪽켠의 종은 “아침종”이라 하고 서쪽켠에 있는 북은 “저녁북”이라고 하는데 이는 절간에서 아침에 종을 두드리고 저녁에 북을 친다는 의미에서 사람을 깨우쳐주는 뜻이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들어온 서쪽문이 정문인줄로 알고있었는데 안내자는 령성문의 맞은켠을 가리키면서 저쪽이 문묘의 정문이라고 했다. 정문은 담장의 가운데 위치해있는데 옛날에는 장원들만 통과할수 있는 문으로 높이가 3메터 된다. 지금의 길림문묘가 건설된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과거제도가 이미 페지되였으므로 정문은 오랜 시간동안 열지 않았었고 길림문묘를 정식으로 대외로 개방하면서 공자제사를 지내거나 대형활동을 치를 때만이 정문을 열게 된다고 한다.
정문으로 가기전에 못이 있다. 고대에 수재에 뽑히면 “입반”이라고 하는데 “반”은 학궁을 이르는 말로서 반지는 원래 학궁전앞에 있는 못을 이르는 말이다. 반지는 공자가 사학을 꾸려 서민들도 공부할수 있게 한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것이다. 그리고 유학을 발양하고 과거제도를 숭상하기 위한 원인도 있었다. 반지의 우에는 아치형다리가 있는데 이는 장원교라고 한다. 학자들은 장원에 뽑히면 문묘에 와 공자께 제사를 지내는데 장원교는 장원만이 통과할수 있는 다리로서 당시 그 높은 지위를 알수 있다. 시험을 앞두고 문묘에 찾아와 자식이 우수한 성적을 따내기를 비는 부모들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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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문묘는 전인들이 남겨놓은 보귀한 유산으로 그 의의가 있다. 길림문묘는 봉건사회통치계급들이 공자를 존중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례의제도를 위해 건립한것이고 그속에는 로동인민들의 지혜와 땀이 슴배여있다. 길림문묘는 우리 나라 고전건축예술의 정수이고 유교건축에서의 특수한 풍격의 보존이다. 오늘날 유학은 실천과 결부하여 부단히 발전되고있으며 현대사회에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다. 유학의 혁신과 부흥은 중화민족의 응집력을 제고,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 과학적발전관을 실현, 당의 건설을 강화하여 국가의 장구안전을 도모, 전통미덕을 발양, 조화로운 세계와 국제경제정치질서를 영유해가는데 유리하다. 길림문묘는 현재 중화민족의 전통문화를 발양하고 애국주의교육을 전파하는 력사적인 사명감을 갖고 여러가지 전람, 문화 활동을 조직하고있다.1992년 길림문묘는 길림시당위, 시정부로부터 길림시애국주의교양기지로 선정되였고 1995년에는 성급중점문물보호단위로 되였으며 2006년에는 국무원으로부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비준받았다.
연길시에서도 소영진 하룡촌에 공자묘를 건설한다고 하니 연변의 공자사당- 연변문묘도 문화명소로 등단할것이다.
글/ 사진 허국화 허성 기자
[출처:조글미디어 media.zogl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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