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료녕신문 2011-05-12 특별취재 김창영 기자]
석골촌의 취재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한것은 어느때인지는 몰라도 무인지대였던 이곳에 우리 조선족들이 가장 먼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해 오늘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이곳 태생인 한창진(62)씨를 통해 알았기때문이였다. 한창진씨가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한족들이 대다수였지만 당시 한다 하는 한족들도 조선족로인들을 몹시 존경했다고 한창진씨는 말했다.
이곳이 조선족들이 처음으로 개척한 삶의 현장이라는 흔적은 마을이름과 골이름에서도 잘 나타났다. 이 마을의 행정명칭이 우리 말로는 석골촌인데 한자로는 석결촌으로 돼있었다. 원래 석골촌이라 불렀는데 후에 이곳에 자리잡은 한족들이 석결촌이라고 불렀다는것이다. 그리고 한창진씨가 살고있는 2조와 1조가 자리잡은 골안을 령우에서 내려다보면 오리발처럼 생겼다고 “오리발골”이라 부르고 3조와 4조가 자리잡은 골안은 “갬굴” 또는 “샘골”이라 불렀다. “샘골”이란 골안에 사시장철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고 붙혀진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갬굴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한창진씨도 해석하지 못했다. 샘골이라는 단어를 토배기 평안도출신인 이곳 사람들이 입말로 갬굴이라 부를수도 있다는 원 량수조선족향 박기현부향장의 해석이 고작이였다.
한창진씨에 의하면 총 5개 소조로 구성된 석골촌은 조선족이 도합 26호가 살고있은바 제2소조에 8호, 제3소조와 제4소조에 각각 9호씩 분포되여있다. 제1소조와 제5소조에는 10여년전부터 조선족의 자취가 사라져 우리의 선조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한족들에게 넘어간 상황이다. 기자가 찾아간 날 한창진씨의 안해는 집에 없었다. 이튿날이 한 마을에 사는 한창진씨의 조카 결혼일이라 일손을 도우러갔던것이다. 조선족들이 눈에 띄게 줄어든 이 마을에 오랜만에 결혼식이 치러진다는 한창진씨의 말을 들으며 이번 그들의 결혼을 계기로 조선족들이 더는 줄어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한창진씨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고있는데 큰딸과 둘째딸은 집안현성에서 식당을 경영하고 셋째딸은 심양으로 시집갔으며 막내아들은 대학졸업후 장춘시에서 출근하고있다. 자식들이 소원대로 행복한 살림을 꾸리고있어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이들 부부는 태를 묻은 고향을 지키는것이 큰 락이란다. 딸과 사위들이 살림을 보태주겠다는것도 마다하고 한전 15무에 옥수수농사를 짓는외에 6년전부터 7무남짓한 밭에 오미자농사를 짓고있다. 지난해만도 오미자수입이 약 3만원에 달해 산골치곤 큰 수입이라 할수 있었다. 이뿐이 아니다. 80여무되는 산장에서 약 50무의 나무판을 제외하고 30여무에 락엽송을 키우고있다. 해마다 나무판을 정리해 락엽송을 옮기는데 지난해도 2,000그루 옮겼고 기자가 찾아간 전날까지 또 2,000여그루 옮겼다면서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 마을 다른 조선족농호들도 생활상황이 한창진씨와 다름이 없단다. 굳이 언급하고 지나가자면 김영복씨, 한천일씨, 한경일씨 등 3호에서 농사와 산장을 가꾸는외 전문 고기잡이로 해마다 6천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있는 사실이다. 이들 모두 한족들에 비해 생활수준이 월등하다는것에 자호감이 갈마들기도 했다.
이 마을에 자랑거리가 하나 더 있다. 곧바로 한창진씨 아들이 장춘에서 출근하는 회사의 김명남사장이 이 마을 태생이라는것, 김명남사장은 20여년전에 고향을 떠나 자수성가한후 고향마을을 잊지 않고 있단다. 3년전 인민페 40만원을 고향에 쾌척, 마을길뿐만아니라 집집의 뜨락까지 콩크리트길을 닦아주었던것이다. 량수조선족향정부의 외자유치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집안시조선족로인협회의 경축활동에도 목돈을 내놓는다며 한창진씨는 자랑스러워했다.
우리의 선조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후세의 뜻있는 분들이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희망적이였다.
[출처:조글미디어 media.zogl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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