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씨야의 고려인
구쏘련에서 고려인들은 원래 원동지구에 집중되여 살았다고 한다.
쓰딸린 시대 1937년경에 고려인들을 우즈베끼스딴,까자흐스딴 등지로 강박 이민시켜
원동지구에는 고려인들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최근 년간 또다시 원동지구에로 모여든다고 한다.
그 주되는 원인은 구쏘련이 해체된 후 그 나라들에서 점차 로씨야어를 쓰지 않고
자국어를 쓰므로 고려인들은 자식들의 장래가 걱정되여 원래 살던 원동지구로 돌아 온다고 한다.
그 밖에 원래 살던 곳에 갈수있게 되였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의 집에 가보면 온돌은 없고 뻬치까에 불을 때는데
한 해 겨울에 두 트럭의 석탄을 땐다고 한다.
집안의 칸마다 문은 없고 그저 커튼으로 가리웠을 뿐이다.
그것은 더운 공기가 서로 통하게 하려는데 원인이 있는것 같다.
고려인치고 장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저녁이면 집집마다 온집 식구들이 모여 앉아 가늘고 긴 비닐 주머니에
자체로 만든 짠지를 넣어 이튿날 장에 내다 파는데 그 모양새는 순대 비슷하였다.
그 장사가 벌이가 되는 것 같았다.
장마당에서 고려인들을 많이 볼수 있었는데 장사덕에 로씨야 사람들보다 더 잘 산다고 한다.
자가용 승용차가 있는 집들도 더러 있었는데 전화가 있는 집은 극히 드믈고로임도 아주 낮았다.
쓰고 사는 집이라든가 가정의 가구를 보면 중국과 비슷하였다.
승용차가 많은 것이 중국보다 나은 것 같았다.
식생활은 중국을 따르지 못하는 것 같다.중국사람들은 먹는것을 중히여겨
식사때면 여러가지 채를 갖춰 먹어대는데 로씨야에서는 빵에다 차나 우유로 간단했다.
우리가 며칠 류했던 고려인 집에서 우리는 그래도 쌀밥과 배추김치,무우짠지를
먹어 보았고 장국도 먹을 수 있었다.
식생활에서 우리가 중국식을 많이 받아 들여 우리것을 많이 잃은것처럼
그네들도 로씨야 습관을 많이 따라 김치가 김치같지 않고 장도 장맛이 아니였다.
다른 나라에 와서 자기 민족의 고유한 풍습을 지킨다는 곳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환경의 영향을 받아 판 다른 갈래로 나가기 마련이다.
그 집 맏며느리가 연변에서 온 한 회사의 경리를 따라 다니면서 통역을 해주었는데
마침내 살기까지하여 결국 그들 부부가 이혼하게까지 되였다.
로씨야에서는 부부가 일단 이혼하면 여자측에서 집을 가지게 되므로
남자는 집에서 쫓겨 난다는 것이다.아마도 법률이 여자측을 편드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집 큰 아들은 아내를 빼았기고 부옇게 부모 집으로 돌아 왔었다.
작은 며느리의 본가집에서는 둘째 아들이 로씨야 여자에게 장가들어 부모들 불만이 컸다.
그 로씨야 며느리는 열 여섯살에 아이를 낳고 열 일곱살에 결혼했는데
아이는 로씨야 사람처럼 생겼다.
구쏘련에서 고려인들은 원래 원동지구에 집중되여 살았다고 한다.
쓰딸린 시대 1937년경에 고려인들을 우즈베끼스딴,까자흐스딴 등지로 강박 이민시켜
원동지구에는 고려인들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최근 년간 또다시 원동지구에로 모여든다고 한다.
그 주되는 원인은 구쏘련이 해체된 후 그 나라들에서 점차 로씨야어를 쓰지 않고
자국어를 쓰므로 고려인들은 자식들의 장래가 걱정되여 원래 살던 원동지구로 돌아 온다고 한다.
그 밖에 원래 살던 곳에 갈수있게 되였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의 집에 가보면 온돌은 없고 뻬치까에 불을 때는데
한 해 겨울에 두 트럭의 석탄을 땐다고 한다.
집안의 칸마다 문은 없고 그저 커튼으로 가리웠을 뿐이다.
그것은 더운 공기가 서로 통하게 하려는데 원인이 있는것 같다.
고려인치고 장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저녁이면 집집마다 온집 식구들이 모여 앉아 가늘고 긴 비닐 주머니에
자체로 만든 짠지를 넣어 이튿날 장에 내다 파는데 그 모양새는 순대 비슷하였다.
그 장사가 벌이가 되는 것 같았다.
장마당에서 고려인들을 많이 볼수 있었는데 장사덕에 로씨야 사람들보다 더 잘 산다고 한다.
자가용 승용차가 있는 집들도 더러 있었는데 전화가 있는 집은 극히 드믈고로임도 아주 낮았다.
쓰고 사는 집이라든가 가정의 가구를 보면 중국과 비슷하였다.
승용차가 많은 것이 중국보다 나은 것 같았다.
식생활은 중국을 따르지 못하는 것 같다.중국사람들은 먹는것을 중히여겨
식사때면 여러가지 채를 갖춰 먹어대는데 로씨야에서는 빵에다 차나 우유로 간단했다.
우리가 며칠 류했던 고려인 집에서 우리는 그래도 쌀밥과 배추김치,무우짠지를
먹어 보았고 장국도 먹을 수 있었다.
식생활에서 우리가 중국식을 많이 받아 들여 우리것을 많이 잃은것처럼
그네들도 로씨야 습관을 많이 따라 김치가 김치같지 않고 장도 장맛이 아니였다.
다른 나라에 와서 자기 민족의 고유한 풍습을 지킨다는 곳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환경의 영향을 받아 판 다른 갈래로 나가기 마련이다.
그 집 맏며느리가 연변에서 온 한 회사의 경리를 따라 다니면서 통역을 해주었는데
마침내 살기까지하여 결국 그들 부부가 이혼하게까지 되였다.
로씨야에서는 부부가 일단 이혼하면 여자측에서 집을 가지게 되므로
남자는 집에서 쫓겨 난다는 것이다.아마도 법률이 여자측을 편드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집 큰 아들은 아내를 빼았기고 부옇게 부모 집으로 돌아 왔었다.
작은 며느리의 본가집에서는 둘째 아들이 로씨야 여자에게 장가들어 부모들 불만이 컸다.
그 로씨야 며느리는 열 여섯살에 아이를 낳고 열 일곱살에 결혼했는데
아이는 로씨야 사람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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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3)
제가 쑈련에 려행하러 갔을적 직접보고 겪던 일들이네요.....그냥 이어나가셔주길 바랍니다.
점점 잼잇네요...계속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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